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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토리

Movie to Fashion 13편

사랑은 컬러 드레스다

Edited by 김도훈




나도 초등학교 때는 밸런타인데이 초콜릿을 좀 받았다. 부끄럽지만 사실이다. 많이 받지는 않았다. 부끄럽지만 이것도 사실이다. 나는 초콜릿을 잔뜩 받을 만큼 여학생들의 심장을 건드리는 타입은 아니었다. 하여튼 초등학교 5학년쯤부터 밸런타인데이는 일종의 대결이 됐다. 어떤 놈이 가장 많은 초콜릿을 받는가가 한동안 학교의 주요 가십거리였다. 초등학교 고학년은 사춘기가 시작되는 시기다. 갑자기 찾아온 본능이 아이들을 당황하게 만들며 수제 초콜릿 따위를 끓이게 만드는 시기다. 부모님도 당황한다. 말 잘 듣던 애들이 갑자기 종일 거울을 쳐다보며 초콜릿도 못 받았다며 신경질을 부리기 시작하는 탓이다. 요즘은 일찌감치 성교육을 한다지만 그 시절은 그런 교육 따위 없었다. 투정 부리는 순간 날아오는 건 어머니의 등짝 스매싱이었다.






그러고 보니 한국인이 밸런타인데이를 즐기기 시작한 것도 이제 거의 반세기가 됐다. 무슨 반세기냐고? 여러분. 나는 1980년대에 초등학교 시절을 보냈다. 그 시절부터 한국인은 밸런타인데이를 기념하며 누구에게 초콜릿을 줄까를 고민했다. 그 정도면 밸런타인데이는 이제 서양 것들의 잘못된 전통을 수입한 것이 아니라 그냥 한국인의 전통이라고 할만하다는 이야기다. 물론 나도 안다. 이 글을 읽는 많은 독자들은 밸런타인데이를 싫어할 것이다. 크리스마스를 싫어하는 것과도 동일한 이유에서다. 연인, 혹은 연인으로 점찍은 사람이 없는 사람에게 밸런타인데이란 남의 잔치다. 아니다. 그렇게 생각하는 건 사랑의 패배자들에게나 어울리는 사고방식이다. 초콜릿을 주고받을 사람이 없더라도 밸런타인데이 시즌은 꽤 사랑스러운 시즌일 수 있다. 지긋지긋한 롱패딩과 코트를 벗고 마침내 봄에 어울리는 옷을 걸칠 수 있는 시즌의 초입인 덕이다. 그리고 여성들에게는, 그렇다. 드레스라는 걸 입을 수 있는 계절이 왔다.






드레스라는 게 참 그렇다. 한국인은 결혼식이 아니라면 드레스를 입을 일이 별로 없다. 친구 결혼식에 갈 때도 우리는 최대한 보수적으로 옷을 선택한다. 신부보다 더 화려한 드레스를 입는 것은 용납되지 않는다. 아니, 어차피 이 글을 읽는 많은 분들의 옷장에는 드레스가 없을 것이다. 한국인에게 드레스는 특별한 행사가 있을 때나 잠깐 입은 뒤 옷장에 처박아두고 ‘당근으로 팔까'를 근심하게 되는 아이템에 가깝다. 나는 그게 항상 좀 안타까웠다.

나는 인터내셔널 미디어에서 일한 경험이 좀 있다. 뉴욕이나 밀라노, 런던으로 출장을 가면 저녁에는 근사한 바에서 공식 칵테일 행사(그러니까 우리말로는 뒤풀이!)가 열렸다. 남자들은 정장을 입고 여자들은 드레스를 입었다. 근사했다. 사실 드레스라는 게 그렇게 갑갑하고 포멀한 옷인 것만은 아니다. 하나의 피스로 만들어진 드레스라는 옷은, 물론 이것이 올드한 남성의 답답한 젠더 의식인지는 모르겠으나, 여성이 소화할 수 있는 가장 아름다운 아이템 중 하나다. 게다가 요즘은 해외 시상식 레드카펫에서 대담한 남성 셀러브리티들도 종종 드레스를 입는다. 나는 조만간 티모시 샬라메가 레드 카펫에서 하나의 피스로 된 드레스를 입고 나올 거라 믿는다. 티모시가 하면 뭐든 납득할 만하다.





(왼쪽부터) <7년 만의 외출>(1955) 마릴린 먼로의 윌리엄 트라빌라의 하얀색 드레스
<티파니에서 아침을>(1961) 오드리 헵번의 검정색 지방시 드레스
<스카페이스>(1983) 미셸 파이퍼가 입은 청록색 새틴 드레스
<어톤먼트>(2007) 재클린 듀란이 디자인한 키이라 나이틀리의 녹색 드레스
(이미지 출처: 각 영화 배급사)



패션 잡지나 영화 잡지들은 언제나 ‘아이코닉한 영화 속 드레스' 순위를 꼽아대곤 한다. 나에게도 몇몇 기억할 만한 영화 속 드레스가 있다. 마릴린 먼로가 <7년 만의 외출>(1955)에서 입었던 디자이너 윌리엄 트라빌라의 하얀색 드레스, 오드리 헵번이 <티파니에서 아침을>(1961)에서 입었던 검은색 지방시 드레스, 미셸 파이퍼가 <스카페이스>(1983)에서 입었던 청록색 새틴 드레스는 모든 영화광들이 칭송하는 드레스들이다. 비교적 최근 영화라면 역시 <어톤먼트>(2007)을 잊을 수가 없다. 거기서 재클린 듀란이 디자인한 녹색 드레스를 입은 키이라 나이틀리는 정말 눈이 부셨다. 하지만 이 모든 아이코닉한 드레스들은 솔직히 말하자면 아무나 입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 드레스들은 어디까지나 ‘영화적 순간'을 위해 창조된 물건들이다. 물론 캐리 브래드쇼라면 입고도 남았겠지만, 우리는 <섹스 앤 더 시티>의 주인공이 아니다. 서울은 뉴욕이 아니다.




 

 


영화 <라라랜드> 포스터
(이미지 출처: 서밋 엔터테인먼트)



하지만 좋은 답변은 존재한다. 아마도 2020년대가 창조한 가장 아름다운 사랑 영화 중 한 편일 <라라랜드>다. 이 사랑스러운 영화 속에서 엠마 스톤은 한결같이 드레스를 입는다. 천문관에서 입고 나온 녹색 드레스, 첫 파티에서 입고 나온 파란색 홀터넥 드레스, 해가 지는 LA를 배경으로 라이언 고슬링과 사랑스러운 춤을 출 때 입은 노란색 드레스, 데이트할 때 입었던 커다란 깃이 달린 핑크색 드레스, 그리고 이루어지지 않은 지난 사랑을 상상할 때 입고 나온 보라색 홀터넥 드레스와 차분한 검은색 드레스. 데미안 셔젤 감독과 메리 조프레스 의상 감독은 그냥 예쁘기 때문에 그 모든 드레스를 선택한 것이 아니다. 엠마 스톤의 캐릭터는 할리우드 배우가 되기를 꿈꾸지만 지방시 드레스를 살 형편은 안 되는, 그러나 자신에게 가장 어울리는 것이 무엇인지를 너무나 잘 알고 있는 여성이다. 그의 드레스들은 거창한 칵테일 파티뿐 아니라 주말 로데오 드라이브나 멜로즈 애비뉴, 혹은 파머스 마켓에 놀러 나갈 때 입어도 좋을 법한 캐주얼한 드레스들이다.





영화 <라라랜드> 스틸 컷
(이미지 출처: 서밋 엔터테인먼트)



물론 드레스를 이야기하면서 ‘캐주얼'이라는 단어를 쓴다는 게 한국적이냐고 묻는 분도 계실 것이다만, <라라랜드>의 드레스들은 당신이 주말 홍대나 한남동, 성수동에 놀러 나갈 때 입어도 충분히 편안하고 근사할 것이다. 여전히 ‘나는 못 입겠다'는 분이 계신다면 저 동네들에 한 번 나가보시라. 2024년의 한국 여성들이 얼마나 남의 눈치 보지 않고 과감하게 옷을 입는지 목격하면 꽤 놀라실 것이다. 물론 이것도 30년 전 압구정에서 ‘이렇게 입으면 기부니 조크든요'라고 말했던 늙은 엑스세대의 견해이긴 하지만, 뭐 어떤가. 사람은 기분이 좋은 대로 입으면 기분이 좋게 마련이다.






물론 이 글을 읽는 분 중 드물게 밸런타인데이 데이트가 잡혀 있는 분이라면, 축하드린다. 사랑이 점점 사라져가는 시대에 여러분은 기어코 사랑의 힘을 믿어 의심치 않는 드문 종족이다. 그날만큼은 당신은 엠마 스톤이며 당신의 데이트 상대는 라이언 고슬링이다. 아니, 당신도 그도 엠마 스톤일 수 있다. 혹은 둘 다 라이언 고슬링일 수도 있다. 그러니 드레스를 입으시라. 녹색 드레스, 노란 드레스, 파란 드레스, 보라 드레스, 어떤 드레스든 좋다. <라라랜드> 속 엠마 스톤은 말한다. “사람들은 다른 사람의 열정에 끌리게 되어 있어. 자신이 잊은 걸 상기시켜 주니까" 그리고 그 열정은 분명히 하나의 피스로 된 컬러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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