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vie to Fashion 12편
모두가 포레스트가 될 수는 없다.
스타일 | 2024. 01. 12 | 조회수 : 2010
Edited by 김도훈

달려야 한다. 신년부터 달려야 한다. 작년 말 충격적인 선언을 들었다. 주치의 선생의 선언이다. “당뇨입니다. 초기지만 확실히 당뇨입니다.” 어떤 정치적 선언보다도 매서운 선언 앞에서 나는 잠시 할 말을 잃었다. 당뇨라니. 내 머릿속 당뇨란 삼시세끼 치즈버거만 10년을 먹은 과체중 미국인이나 걸리는 병이었다. 나는 삼겹살도 좋아하지 않는다. “그럼 콜라 같은 걸 끊으면 되나요? 제가 콜라 중독이라서요” 선생은 말했다. “살아남을 길은 하나밖에 없습니다. 운동입니다" 그는 허벅지 근육의 중요성에 대해 일장 연설을 늘어놓았다. “인간의 근육 중 가장 큰 게 허벅지 근육이에요. 그 근육을 길러야 당뇨를 극복할 수 있어요.” 왜 허벅지 근육이 당뇨와의 전쟁에서 중요한지는 구글을 검색해 보시길 부탁드린다. 이 칼럼은 패션 칼럼이지 의학 칼럼은 아니니까 말이다.
병원을 나서며 생각했다. PT를 받아야겠다. 나도 PT를 받아본 적은 있다. 이유는 여러분과 같았다. 여름용 근육을 만들고 싶어서였다. 패션을 지나치게 사랑하는 지나치게 게으른 자들에게 여름은 힘든 계절이다. 제멋대로 생겨먹은 몸을 캐시미어 코트와 가죽 재킷으로 현란하게 가릴 수 있는 계절은 생각보다 길지 않다. 얇은 티셔츠와 짧은 반바지로 내 몸의 모든 허점을 만천하에 공개해야만 하는 계절은 생각보다 길다. 패션에 있어서라면 여름은 가장 민주주의적인 계절이다. 30만 원짜리 명품 티셔츠를 입는다고 3만 원짜리 SPA 브랜드 티셔츠를 입은 사람보다 패션 피라미드의 압도적인 우위를 차지할 수는 없다. 이걸 어떻게 아냐고? 지금 내 옷장에는 수십만 원짜리 티셔츠가 잔뜩 걸려 있다. 관리 안 한 몸을 어떻게든 돈으로 가려보겠다던 내 과거의 실패들이 줄줄이 걸려 있다.
문제는 허벅지 근육이 여름 전 반짝 PT로는 만들어지기 힘들다는 사실이다. 허벅지 근육을 만들려면 유산소 운동과 근력 운동을 함께 해야 한다. 꾸준한 달리기가 필요하다. 물론 헬스장에서도 달릴 수는 있다. 더럽게 재미가 없을 따름이다. 게다가 PT 받은 뒤 달리기는 (적어도 나로서는) 불가능하다. 나는 하체를 처음 받은 날 샤워실로 달려가 구토를 했다. 달려간 것도 아니다. 너덜거리는 하체를 붙잡고 기어가서 토했다. 헬스하는 사람들이 인스타에 올리는 ‘하체 하는 날'이 얼마나 무시무시한 날을 의미하는 것인지 비로소 알게 된 것이다. 그래서 나는 달리기로 결심했다. 집이 마포대로에 있으니, 한강까지 달리면 충분할 터였다. 물론 아직은 결심만 한 상태다. 그래서 언제부터 시작할 거냐고? 패션 사이트에 실리는 이 칼럼을 찾아 읽는 당신이라면 이미 대답을 알고 있다. 달리기 좋은 착장이 완벽하게 갖춰지는 순간부터다.

패션 좋아하는 사람들의 문제가 바로 이거다. 뭔가 새로운 일이나 취미를 시작하려면 일단 스타일부터 완성해야 한다. 독자분들 중에서는 단 한 번의 스키 여행을 위해 구입한 무시무시하게 값나가는 스키복, 단 두 번 뒤 산을 오르느라 구입한 스타일리시한 등산복 등을 옷장에 잔뜩 걸어두고 있는 분들이 분명 계실 것이다. 옷장을 열 때마다 몽클레르에서 산 2백만 원짜리 스키 재킷이 ‘날 이 따위로 취급하려면 필요한 사람에게 당근으로 팔아치우는 게 낫지 않겠어?’라고 구슬프게 속삭이고 있을지도 모른다. 나도 여러분과 같은 스타일 병자다. 뭘 하려면 일단 옷부터 떠올리는 불치병 환자다. 달리기로 마음먹은 순간부터 ‘마포대로를 가장 스타일리시하게 달리기 위한 착장'을 고민하기 시작했다. 운동(Athlete)과 레저(Leisure)를 합성한 ‘애슬레저룩'이라는 단어가 일반적으로 통용되는 단어가 된 지도 꽤 됐다. 이제 세상의 모든 브랜드는 애슬레저룩을 위한 아이템을 내놓는다. 발렌시아가가 츄리닝 바지를 파는 시대다. 크리스토발 발렌시아가 생전에는 꿈도 꾸지 못했을 시대가 온 것이다.
그러나 신년의 나는 조금 달라지기로 했다. 달리기를 위한 특별한 착장이라는 게 정말 필요한 것인가? 포레스트는 그러지 않았다. <포레스트 검프>(1994)의 포레스트에게 달리기 위한 착장 같은 것은 없었다. 아이큐 75의 포레스트는 아이들에게 괴롭힘을 당할 때마다 뛰었다. 제니가 “뛰어!”라고 말한 순간부터 뛰었다. 그에게 달리기 재능이 있었던 건지는 모르겠다. 그는 일단 뛰었다. 뛰다 보니 잘 뛰게 됐다. 잘 뛰다 보니 추종자들이 생겼다. 무작정 달리는 걸로 유명해진 그의 옆에서 기자들이 묻는다. “세계평화를 위해서 뛰는 건가요? 홈리스를 위해 뛰는 건가요? 여성 인권을 위해 뛰는 건가요? 환경을 위해 뛰는 건가요? 동물권을 위해 뛰는 건가요?” 포레스트는 답한다. “그냥 뛰고 싶어서요" 그렇다. 뛰고 싶어서 뛰는 것. 그것이야말로 포레스트를 3년, 2개월, 14일, 16시간 동안 끝없이 달리게 한 원동력이었다. 김연아도 “무슨 생각 하면서 훈련을 하세요?”라는 질문에 이렇게 답하지 않았던가 말이다. “무슨 생각을 해. 그냥 하는 거지”
가만 생각해 보니 나에게는 포레스트 검프가 뛸 때 입었던 모든 아이템이 옷장 속에 있었다. 바람이 잘 통하는 스냅백 모자, 나이키 로고가 그려진 티셔츠, 땀이 잘 흡수될 것 같은 반바지, 나이키 코르테즈 운동화. 사실 그거면 충분하다. 나는 내적 환호성을 질렀다. 누군가 다가와서 “왜 뛰세요?”라고 물어보면 시크하게 “그냥 뛰고 싶어서요"라고 말할 완벽한 준비가 된 것이었다. 물론 그런 걸 물어보는 사람은 절대 없을 테지만, 머리부터 발끝까지 언더아머를 입은 사람들 사이에서 대충 집에 있는 걸 끌어모아 생각 없이 걸친 듯한 옷차림으로 뛰는 건 어쩐지 더 간지가 날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렇다. 이것 역시 위에서 언급한 스타일 불치병의 일종이다. 대충 입은 느낌을 일부러 주는 것. 그것이야말로 21세기의 가장 지독한 스타일 병이다. 나는 포레스트 검프가 될 수 없다. 가오가 육체를 지배하는 나 같은 인간은 결코 포레스트 검프가 될 수 없다.
게다가 옷장에서 발견한 나이키 티셔츠와 반바지는 몸에 들어가지도 않았다. 가만 생각해 보니 지난 5년간 가장 크게 달라진 건 사이즈다. 95사이즈 티셔츠를 입던 나는 이제 105사이즈를 입어야 한다. 28사이즈 바지를 입던 나는 이제 34사이즈를 입어야 한다. 나는 깨달았다. 당뇨의 원인이 무엇인지를 확실히 깨달았다. 신년에는 달려야 한다. 정말로 달려야만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달리기 위한 옷을 사야만 한다. 그러니 이 글은 결국 ‘완벽한 착장을 구비해야만 운동을 시작할 수 있는 스타일 불치병 환자의 고백’으로 끝이 나야만 할 것이다. 어쩌겠는가. 다시 말하지만, 모두가 포레스트 검프가 될 수는 없는 것이다. 다만 나이키 코르테즈를 새로 살 필요는 없다. 신비하게도 발은 살이 찌지 않았다. 아직은 그렇다는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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