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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ovie to Fashion 10편

올가을에는 ‘너드’를 입으라

Edited by 김도훈




상철이 등장하는 순간 나는 직감했다. 이 남자는 너드다. 분명히 뭔가 기술에 관련된 직업을 갖고 있을 것이다. 반드시 뭔가를 모으는 취미를 갖고 있을 것이다. 꾸미는 데는 관심이 없지만 취향만은 확실할 것이다. 남들이 좋아하는 것을 입는 대신 자기가 좋아하는 것만 입을 것이다. 맞다. 이건 <나는 솔로> 16기의 상철 이야기다. 나는 정말 눈을 믿을 수가 없었다. <나는 솔로>는 연애 상대를 찾는 프로그램이다. 남성 출연자들은 어떻게든 여성 출연자들이 좋아할 법한 옷을 입고 나오게 마련이다. 물론 그게 항상 성공적인 건 아니다. 오랫동안 연애를 못 해 이 프로그램에 나오는 남성들에게는 여러 가지 결격 사유가 있게 마련이다. 스타일은 가장 큰 결격 사유 중 하나다. 그래도 그들은 노력을 한다. 어떻게든 여성들의 눈에 들기 위해 애를 쓴다.





<나는 솔로> 16기 상철
(이미지 출처: SBS 홈페이지)



상철은 애쓰지 않았다. 수사자 얼굴이 거대하게 프린트된 후드티를 입고 등장했다. 어쩌면 그는 생각했을 것이다. 수사자의 남성미와 위엄으로 여성 출연자들을 한눈에 사로잡겠어. 맙소사. 그런 게 통할 리가 있나. 에피소드를 계속 보다 보니 그는 여성 출연자들을 사로잡겠다는 마음으로 수사자 후드티를 입고 나온 것도 아니었다. 그는 심지어 판다가 그려진 셔츠와 몰티즈가 그려진 셔츠를 입고 나오기 시작했다. 이 남자는 그냥 동물을 좋아하는 사람이었다. 동물이 좋아 동물이 프린트된 옷을 샀을 뿐이다. 그런 옷을 일상적으로 입기 때문에 아무런 생각 없이 <나는 솔로>에도 입고 나왔을 뿐이다. 나는 박수를 쳤다. 너드는 다르다. 역시 다르다.





영화 (좌) <스티브 잡스>, (우) <소셜 네트워크> 포스터
(이미지 출처: 다음 영화)



그러니까 세상에는 너드 패션이라는 게 존재한다. 위키피디아에 따르면 너드(Nerd)는 지능은 뛰어나지만, 강박관념에 사로잡혀 있거나 사회성이 떨어지는 사람을 전형적으로 일컫는 말이다. 이들은 스타일도 다르다. 유행하는 패션이나 스타일에는 전혀 신경 쓰지 않는다. 그저 편하면 장땡이다. 그렇다고 스타일에 아예 관심이 없는 건 아니다. 오히려 그들은 반복적으로 비슷한 아이템을 입는 것으로 자신들만의 스타일을 완성해 왔다.





똑같은 패션 스타일을 고수하는 너드 패션의 리더
(위) 스티브 잡스, (아래) 마크 저커버그



이를테면 너드 세계의 리더라 할 만한 스티브 잡스와 마크 저커버그를 생각해 보시라. 잡스는 이세이 미야케의 검은 터틀넥, 리바이스 청바지, 뉴발란스 992 운동화만 신었다. 저커버그는 브루넬로 쿠치넬리의 회색 티셔츠만 수십 벌을 사서 갈아입는다. 한때 이들의 스타일은 조롱의 대상이었다. 지금은? 그들은 그 자체로 패션 아이콘이다. 남의 눈 신경 쓰지 않고 자기 편한 대로 한가지 스타일을 고집했더니 그것은 패션이 됐다. 그리고 그들의 패션은 영화 <스티브 잡스>(2016)와 <소셜 네트워크>(2010)에서 멋지게, 심지어 패셔너블하게 다시 새겨졌다.





(좌) 웨스 앤더슨, (우) 크리스토퍼 놀란의 영화 촬영 현장



너드의 패션을 가장 멋지게 스크린에 구현해 내는 감독은 당연히 웨스 앤더슨일 것이다. 웨스 앤더슨은 크리스토퍼 놀란과 함께 현존하는 가장 스타일리시한 영화감독이다. 두 사람은 험난한 영화 현장에서도 머리부터 발끝까지 수트를 차려입기로 유명하다. 그들이 멋 부리는 걸 좋아해서 그렇다고 지레짐작할 수도 있다. 사실 그들이 수트를 입는 건 그게 제일 편하기 때문이다. 놀란이 수트를 입는 이유는 사무실에서도 현장에서도 입을 수 있는 옷이기 때문이고, 또 “매일매일 뭘 입어야 할지 고민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웨스 앤더슨의 이유도 “제일 편하기 때문"이다. 물론 둘의 스타일은 약간 다르다. 놀란이 새빌로우에서 맞춘 듯한 수트를 입는다면 앤더슨은 뉴욕 빈티지 마켓에서 산 듯한 코듀로이 수트를 좋아한다. 지 편한대로 입다 보니 스타일 아이콘이 되어버린 ‘영화 너드'들이다.





너드 패션의 정석을 보여주는 웨스 앤더슨 감독의 영화
(왼쪽부터 순서대로) <맥스군 사랑에 빠지다>, <로열 테넌바움>, <스티브 지소와의 해저 생활>



그래서 웨스 앤더슨의 영화는 진정한 너드 패션의 천국이나 마찬가지다. <맥스군 사랑에 빠지다>(1998)의 빨간 베레모와 교복, <로열 테넌바움>(2001)의 빨간색 아디다스 트레이닝복, <스티브 지소와의 해저 생활>(2004)의 유니폼과 빨간 비니는 웨스 앤더슨 자신의 취향을 반영한, 기겁할 정도로 강박적이고 반사회적인 너드들의 옷차림에 대한 찬사다.



영화 <로열 테넌바움> 스틸 컷



웨스 앤더슨은 애니메이션 <판타스틱 미스터 폭스>(2009)의 주인공 폭스에게는 아예 자신과 똑같은 코듀로이 슈트를 입혔다. 나는 알레산드로 미켈레의 첫 번째 구찌 패션쇼를 보면서 웨스 앤더슨의 영화들이 눈앞에서 스쳐 지나가는 경험을 했다. 그건 고전적인 너드의 패션이 이제 주류 패션이 되었다는 어떤 역사적 증거나 마찬가지였다. 너드함이 트렌드가 되어버린 것이다.





구찌의 화려한 부활을 알렸던 알레산드로 미켈레의 첫 번째 구찌 패션쇼
(이미지 출처: Istituto Marangoni)



그렇다면 한국의 너드 패션은 뭐냐고? 한국 너드들이 코듀로이 수트나 아디다스 트레이닝복을 입고 다니지는 않지 않냐고 당신은 묻고 싶을 것이다. 사실 잡스나 저커버그 같은 IT 너드들의 패션은 이미 우상화가 됐다. 웨스 앤더슨식 너드 패션은 이제 멋 부리는 패셔니스타들의 것이 되어버렸다. 걱정마시라. 당신이 진정한 한국 너드라면 이미 옷장에 가득한 아이템이 하나 있을 것이다. 체크 셔츠다. 판교에서 일하는 친구 중 하나는 점심시간이 되면 IT 회사 건물에서 쏟아져 나오는 체크 셔츠의 물결을 이미 나에게 증언한 바 있다. 인터넷 사람들은 종종 “왜 공대생들은 다 체크 셔츠를 입는 걸까요?”라는 질문을 던지곤 한다. 체크 셔츠는 이제 한국 공대생, IT 너드들의 유니폼 같은 것이 됐다.

영화로도 개봉한 왓챠의 퀴어 드라마 <시맨틱 에러> 주인공인 컴퓨터공학과 너드도 매일매일 체크 셔츠를 입는다. 그에게 관심이 있는, 패션에 꽤 신경을 쓰는 디자인과 캐릭터는 그를 찾으러 공대에 갔다가 똑같은 체크 셔츠를 입은 남자들 사이에서 혼돈에 휩싸인다. 이건 한국 공대생들의 무시무시한 체크 셔츠 애호를 가장 즐겁게 묘사한 장면 중 하나일 것이다.






재미있게도 2023년의 가장 도드라지는 패션 트렌드 중 하나는 체크 셔츠다. 특히 1990년대와 2000년대 Y2K 패션이 돌아오면서 너바나 같은 얼터너티브 밴드가 즐겨 입던 플란넬 체크 셔츠가 화려하게 런웨이에 복귀했다. 나는 체크 셔츠를 그리 좋아하는 사람이 아니다. 셔츠는 무조건 단색으로 입어야 한다고 굳건하게 믿어왔다. 하지만 뭔가가 트렌드가 되면 예전에는 전혀 신경 쓰지 않던 아이템이 갑자기 눈에 들어오기 시작하는 법이다. 그래서 나는 요즘 플란넬 체크 셔츠를 하나 구입해볼까 고민 중이다. 사람 취향이란 건 참 갈대처럼 줏대가 없다. 어쩌겠는가. 트렌드는 그렇게 돌고 도는 것이다. 다만 상철이 입은 동물 프린트 셔츠가 유행하는 날이 오기까지는 시간이 좀 걸릴 것이다. 물론 그런 날이 오지 않으리라는 법은 없다. 경각심을 가져야 한다. 경각심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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